Ch.8 개항기와 대한제국
항일 의병 운동
나라를 지키려 총 들고 일어선 사람들
을미사변, 을사늑약, 군대 해산 — 위기가 깊어질수록 더 많은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유생에서 평민으로, 평민에서 해산 군인으로. 의병의 대열은 점점 넓어졌습니다.
칼과 창으로 일본 정규군에 맞설 수 있었을까?
을미·을사·정미 — 세 단계 의병 운동의 계기와 인물, 그리고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까지 정리합니다.
핵심 내용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유생들이 일어서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이 동시에 터지면서,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을미의병입니다.
을미의병 · 유생 주도 · 유인석 · 아관파천 후 해산
평민 의병장이 처음 등장하다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다시 의병이 봉기합니다. 을사의병의 핵심 특징은 참여 계층이 넓어졌다는 것, 그리고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신돌석은 을사의병(1905) 때 등장! 시험에서 '정미의병 때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등장했다'고 헷갈리게 출제합니다. 신돌석 = 을사의병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세요.
해산 군인이 합류하여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다
1907년,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됩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신식 무기와 전투 경험을 가지고 의병에 합류하면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됩니다.
서울 진공 작전 실패 원인 1. 이인영 귀향: 총대장이 부친상으로 군대를 떠남 2. 일본군의 화력 우세 3. 각 부대 간 연락·보급 체계 미비 허위는 끝까지 싸웠으나 체포 후 교수형으로 순국합니다.
정미의병 · 해산 군인 합류 · 이인영 · 허위 · 서울 진공 작전
유생에서 평민으로 평민에서 해산 군인으로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들은 만주·연해주로 이동하여 1910년대 독립군의 모체가 됩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 등장한 시기는?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은 허위이다.
정미의병의 직접적 계기는?
핵심 용어
계기
을미사변 + 단발령
주도 세력
유생 (위정척사 사상)
대표 인물
유인석(제천), 이소응(충주)
해산 계기
아관파천(1896) 이후 해산
민종식
충남 홍주(홍성) — 을사의병 대표
최익현
전북 태인 — 74세에 거병, 대마도 순국
신돌석
경북 영해 — 최초의 평민 의병장
결성
1907년 말, 경기도 양주
총대장
이인영 (유생)
군사장
허위 (실질 군사 지휘)
규모
약 1만 명
목표
서울 진공 작전
결과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 실패
을미(1895)
을미사변+단발령 / 유생 주도 / 유인석
을사(1905)
을사늑약 / 유생+평민 / 신돌석(평민 의병장)
정미(1907)
군대 해산 / 해산 군인 합류 / 이인영·허위
정리 노트
을미의병 · 을사의병 핵심 정리
을미의병 (1895)
- 계기
-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 단발령
- 주도 세력
- 유생 (위정척사 사상)
- 대표 인물
- 유인석 (제천), 이소응 (충주)
- 해산 계기
- 아관파천(1896) 이후 단발령 철회로 해산
을사의병 (1905)
- 계기
- 을사늑약 — 외교권 박탈
- 특징
-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 등장 (경북 영해)
- 주요 인물
- 민종식(홍주) · 최익현(태인, 대마도 순국)
- 주의
- 신돌석 = 을사의병 (정미의병 아님!)
신돌석 = 을사의병(1905) 최초 평민 의병장 — 정미의병이라고 하면 오답! 을미의병 해산 =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 철회가 직접 계기)
핵심 정리
- 1의병 3단계: 을미(유생) → 을사(평민 확대) → 정미(해산 군인 합류)
- 2핵심 인물: 유인석(을미) · 신돌석(을사) · 이인영+허위(정미)
- 313도 창의군: 서울 진공 → 이인영 귀향으로 실패
- 4의의: 자발적 무장 투쟁 + 참여 계층 확대 + 독립군 기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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