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7 조선시대 (후기)

영조의 탕평책

영조의 완론탕평 방식과 한계를 설명한다균역법·속대전·탕평비 등 영조의 주요 업적을 정리한다이인좌의 난과 임오화변의 배경·결과를 이해한다

52년 재위 왕의 대타협 실험

환국정치로 피바람이 반복되자,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며 선언합니다 — '편당을 짓는 자는 임금의 신하가 아니다.' 하지만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콤플렉스를 품은 왕은 어떻게 52년을 버텼는가?

완론탕평과 균역법 — 영조의 개혁과 비극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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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내용

당파 싸움 좀 그만하자! 콤플렉스의 왕이 외치다

영조(재위 1724~1776)는 조선 최장 52년 재위 왕입니다. 어머니가 숙빈 최씨(무수리 출신)이었고, 형 경종 독살 의혹까지 있어 평생 정통성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탕평은 완론탕평 — 각 당파의 온건파(완론)를 중심으로 조정을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강경파를 배제하고 타협 가능한 사람들끼리 함께 일하게 한 것입니다.

시험 포인트 * 완론탕평 = 온건파 중심 균형 인사 (모든 당파를 동등하게 등용한 것이 아님) * 탕평비 = 성균관 앞에 건립 (경복궁이 아님!) * 탕평파 = 특정 당파가 아닌 여러 당파 온건파의 연합

완론탕평 = 온건파 중심 균형 인사

반란을 넘고 백성의 등짐을 덜다

1728년 이인좌의 난 — 소론·남인 강경파가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왕'이라며 충청도 청주에서 거병합니다. 약 2주 만에 진압되지만, 영조는 큰 충격을 받고 더욱 탕평에 매진합니다.

균역법(1750) * 군포 2필 → 1필로 감축 * 부족 재원 보충: 결작(토지세) + 어장세·염세 + 선무군관포 * 한계: 양반의 군역 면제는 그대로 유지

기타 업적 * 속대전(1746): 경국대전 이후 법령 보충 법전 * 서원 정리: 남설 억제 (근본적 정리는 흥선대원군 때) * 신문고 부활, 가혹한 형벌 폐지, 준천사업(청계천 준설)

균역법(2→1필) · 속대전 · 탕평비(성균관) · 이인좌의 난(1728)

뒤주가 닫히고 조선이 둘로 갈라지다

1762년 임오화변 —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입니다. 이 비극은 노론 내부를 다시 갈라놓습니다.

1724: 영조 즉위

1728: 이인좌의 난 → 진압

1742: 탕평비 건립(성균관)

1746: 속대전 편찬

1750: 균역법 시행

1762: 임오화변(사도세자)

균역법은 정조 때 군포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행되었다

영조가 성균관 앞에 세운 것으로, 탕평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영조의 탕평책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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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용어

벽파

사도세자 죽음은 정당 (영조 결정 지지)

시파

사도세자는 억울 (정조 대에 추존 지지)

edit_note

정리 노트

영조의 개혁 정책 총정리

탕평

방식
완론 탕평 — 각 당파 온건파 중심
상징
탕평비 — 성균관 앞 건립 (경복궁 아님!)

주요 업적

균역법(1750)
군포 2필 → 1필 / 결작·선무군관포·어장세 보충
속대전(1746)
경국대전 이후 법령 보충 법전
이인좌의 난(1728)
소론·남인 강경파 반란 → 진압
임오화변(1762)
사도세자 뒤주 사사 → 시파·벽파 분화

완론탕평 = 온건파 중심 (모든 당파 동등 등용이 아님!) 균역법 보충 재원: 결작(1결 2두) + 선무군관포 + 어장세·염세·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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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 1실제로는 노론 우세 유지 — 완전한 균형이 아님
  • 2탕평이 왕의 의지에 의존 → 왕이 바뀌면 흔들림
  • 3강경파의 불만 누적
  • 4사도세자 사건으로 노론 내부까지 분열
  • 5영조 = 완론탕평 + 균역법(2→1필) + 속대전 + 탕평비(성균관)
  • 6이인좌의 난(1728) = 소론·남인 강경파 반란
  • 7임오화변(1762) = 사도세자 → 벽파·시파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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