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0 현대사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을 넘어 탱크가 밀려왔다
일요일 새벽, 잠든 한반도를 포성이 깨웠습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은 마지막 방어선을 사수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기적, 중공군의 개입, 1.4 후퇴 — 전선은 네 번이나 뒤집혔습니다.
서울이 네 번 주인이 바뀌는 동안, 한반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남침에서 정전까지 — 3년간의 비극 속으로 들어갑니다.
핵심 내용
1950년 초반, 38선 위에 전운이 감돌았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된 후, 38선을 경계로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계속됐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며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했습니다.
애치슨 라인(1950.1) 한국을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 선언 → 북한의 남침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평가
일요일 새벽, 240대의 T-34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국군은 주말 외출·외박 중이었고,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왔습니다. 당시 국군에는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6월 28일,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시민이 서울에 고립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6.25 남침(일요일 새벽) → 3일 만에 서울 함락(6.28) → 한강 인도교 폭파
부산만 지키면 보급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막아야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5일 당일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소련은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를 보이콧 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서울→대전→대구→부산으로 계속 밀려났습니다. 1950년 8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설정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부산 교두보) 위치: 포항~마산 약 240km 기간: 1950.8~9 (약 한 달) 주요 전투: 다부동, 영천, 포항 전투
불가능하니까 오히려 기습이 된다 맥아더의 역발상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봤지만, 맥아더는 바로 이 허점을 노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부산 간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됐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유엔총회 결의(10.7)에 따라 38선을 돌파해 북진했고,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9.15) → 서울 수복(9.28) → 38선 돌파 → 평양 점령(10.19)
38선 돌파의 근거 = 유엔총회 결의(1950.10.7). 유엔 안보리 결의가 아닙니다!
통일이 눈앞이었다 그런데 30만 명의 적이 나타났다
1950년 10월, 약 30만 명의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미군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면 자국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흥남 철수 작전(1950.12)에서는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빼앗겨 이를 1.4 후퇴라고 합니다.
서울의 주인이 4번 바뀌다 남한 → 북한(6.28) → 남한(9.28) → 북한·중공군(1.4) → 남한(3.14)
전쟁은 멈췄지만 끝나지는 않았다
1951년 봄 리지웨이 장군의 반격으로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한 뒤,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됐습니다. 1951년 7월부터 정전 협상이 시작됐고, 최대 쟁점은 포로 교환 문제였습니다.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에 반대하며 반공포로 약 2만 7천 명을 독단적으로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정전은 진행됐습니다.
정전협정 ≠ 평화협정! 정전은 '전투 행위 중지'일 뿐, 법적으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3년의 전쟁, 6단계로 기억하자
1950.6.25: 북한 남침 — 3일 만에 서울 함락
1950.8~9: 낙동강 방어선 — 최후의 보루
1950.9.15: 인천상륙작전 — 전세 역전
1950.10: 중공군 개입 — 판도 재역전
1951.1.4: 1.4 후퇴 — 서울 재함락
1953.7.27: 정전협정 — 휴전 (평화협정 아님)
전쟁의 결과 남한: 반공 체제 강화,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 체결 피해: 남북한 약 500만 명 사상, 1천만 이산가족 발생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 = 이승만이 정전 반대의 대가로 확보한 안보 장치
전세 역전의 두 장면 방향은 정반대
6.25 전쟁의 정전협정에 대한민국(이승만)도 서명하였다.
6.25 전쟁에서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6.25 전쟁
핵심 용어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참전국 수
16개국 (전투 부대 파견)
소련 불참 이유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 보이콧 중
서명 장소
판문점
서명자
유엔군(클라크)·북한(남일)·중국(팽덕회)
한국
이승만 서명 거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북 각 2km
비교 정리
| 항목 | 인천상륙작전 | 1.4 후퇴 |
|---|---|---|
| 시기 | 1950.9.15 | 1951.1.4 |
| 성격 | 공세 전환 (역전의 계기) | 방어·후퇴 (서울 재함락) |
| 원인 | 맥아더의 기습 작전 | 중공군 대규모 개입 |
인천상륙 = 우리 쪽 반격, 1.4 후퇴 = 중공군으로 인한 재후퇴
정리 노트
6.25 전쟁 전반부 핵심 정리
전쟁 발발 (1950.6.25)
- 성격
- 북한의 기습 남침 (새벽 4시)
- 초기 전황
- 3일 만에 서울 함락 → 낙동강까지 후퇴
- 유엔 참전
- 안보리 결의 (소련 보이콧 → 거부권 없음) → 16개국 파병
유엔군 참전 배경
- 소련 불참 이유
-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 보이콧 중
- 결과
- 소련 거부권 행사 못함 → 유엔군 창설 가능
유엔군 참전 가능 이유 = 소련이 안보리를 보이콧하여 거부권 행사 불가 낙동강 방어선 = 1950.8~9 (포항~마산 교두보)
정전협정 핵심 정리
정전협정 (1953.7.27)
- 서명국
- 유엔군·북한·중국 — 한국은 서명 거부
- 이승만의 반발
- 반공포로 약 2.7만 명 독단 석방(1953.6)
- 결과
- 군사분계선 설정 / 비무장지대(DMZ) 설치
- 성격
- 정전(휴전) — 평화협정·종전 아님
전쟁의 결과
- 인명 피해
- 남북 합계 약 300만 명 이상 사망·부상
- 분단 고착
- 38선 → 군사분계선으로 변화
- 냉전 심화
- 남북 적대적 분단 체제 확립
정전협정 서명 = 유엔군·북한·중국 (한국 서명 거부!) 정전 = 전쟁 일시 중단 / 종전·평화협정 아님
핵심 정리
- 16.25 = 북한의 남침 (일요일 새벽 기습)
- 2인천상륙작전(9.15) =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
- 3정전협정(1953.7.27) ≠ 평화협정. 한국은 서명 거부
- 4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 = 정전 반대의 대가로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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